필라델피아 택시의 승차거부
[World & Now] 필라델피아 택시의 승차 거부
전미경제학회가 시작된 지난 3일 밤 필라델피아는 `눈 폭탄`을 맞은 상태였다. 미국 동북부를 강타한 겨울 폭풍의 칼바람은 체감온도를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뜨렸다. 취재를 마치고 행사장인 메리어트 필라델피아 호텔 근처에서 택시에 올라탔다. 7마일(11.3㎞) 떨어진 식당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더니 운전기사가 대뜸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차 거부의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힐 만큼 황당했지만 다른 택시로 갈아탔다. 그러나 이번 운전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한 시간 넘게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국 세 번째 택시에서는 `두둑한 팁`을 내걸고 나서야 2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라리 겨울 폭풍과 눈을 핑계로 내세웠다면 속이나 덜 상했을 것이다. 너무 멀어서 못 가겠다는 말은 아예 대놓고 손님을 가려 태우겠다는 얘기였다. 미국에서 7마일은 시쳇말로 동네 슈퍼마켓 가는 정도의 거리다.
이튿날 만난 현지 주재원에게 이런 사연을 얘기해주자 한마디로 원인을 정리해줬다. "그만큼 손님이 많아졌고, 먹고살기 좋아졌다는 뜻이지요."
경제위기가 맹위를 떨쳤던 2009년 미국에선 `불경기 택시(Recession Ride taxi)`가 화제가 됐다. 승객이 주는 대로 택시비를 받는 서비스다. 그만큼 승객이 귀했다. 이 택시를 탄 승객들은 음악 CD나 슈퍼마켓 선불카드로 택시비를 내기도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미국 경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특히 최근 미국의 경제지표는 `서프라이즈`의 연속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난해 말 130만명에게 주던 장기 실업수당이 뚝 끊겼지만 미국 여론은 침묵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경제가 살아난 만큼 `퍼주기식 복지`는 그만둘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팽배해졌다는 의미다.
아슬아슬한 대목은 미국인들이 마치 호황을 눈앞에 둔 것처럼 들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불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 열풍이 그런 예다. 올해 13개주가 인상을 단행한 데 이어 여러 지역에서 앞다퉈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은 임금 인상 파티를 벌일 만큼 미국 경제가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달 워싱턴DC에 들어선 월마트에는 600명의 직원을 뽑는 데 무려 2만3000명이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 성공률 2.6%다. 실업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위기 전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장기 경제활동 참가율을 대입한 실업률은 7%가 아니라 11%대라는 주장도 있다.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위기는 활황을 섣불리 장담했을 때 벌어졌다. 미국 경제가 어떠한 회복 경로를 밟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워싱턴 = 이진우 특파원 jeanoo@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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