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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명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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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명 |
천덕명동지가 외친 것은 월급제 사수와 노동탄압 분쇄였다. 故 천덕명동지는 경남 고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살다가 스무살이 되어 인천으로 상경하여 공장생활을 시작으로 가난하지만 깨끗한 노동자로 젊음을 시작하였다.
인천으로 상경후 오랫동안 합판공장을 꾸준히 다니며 착하고 성실하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았고 활기있는 생활을 하였다.
27살이 되어 지금의 부인을 만나 12살인 딸과 8살인 아들을 두며 가장으로써 모범적이고 성실한 생활로 동네 어른들로부터 단란한 가정으로 칭찬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1993년 당시 서른살의 나이로 경인운수의 전신인 영화교통을 입사한 동지께서는 명랑하고 온순한 성품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주위에 항상 사람으로 넘쳤고 그 중심에 있었다. 또한 입사초부터 대의원활동을 시작으로 2001년까지 6년간의 회계감사를 역임하여 노동조합의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앞장서 활동하고 근무 또한 타의 모범이 될 만큼 성실하게 하였다. 2002년 5월 민주택시연맹 인천본부의 65일간의 긴 파업속에서도 끝까지 동지들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고참임에도 불구하고 경인운수의 자랑인 파업 깃발단을 이끌며 열성적으로 맡은바 소임을 다 하였다. 항상 조합원들로부터 신망과 신뢰를 받아온 고인은 2002년 9월 또다시 대의원을 맡으며 투쟁으로 쟁취한 월급제를 끝까지 사수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고자 하였다. 언제나 노동조합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던 활동과 월급제 쟁취투쟁 및 안착에 선봉에 있던 고인을 회사는 집중적이면서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9월부터 전격적으로 시행된 월급제를 무산시키고 고인의 활동을 탄압하고자 혈안이 된 회사는 200만원이 넘게 입금을 하였음에도 50여만원을 임금으로 계산하여 실제 30여만원의 급여를 지급하였다. 부당한 불성실근무 제재와 임의적인 성과급 감산, 개인택시 경력을 축소조작하는가 하면 급기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고인에게 참석을 통보하였다. 평소 착하기만 하던 고인의 성품도 참는데 한계가 있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고인께서 "이렇게 당하고 있을수만은 없다", "회사가 해도 너무한다.", "회사를 가만히 두고만 봐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고 분개하였다.
분신 3일전 노동조합 사무실에 모여있던 여러명의 조합원들에게 부당한 회사의 탄압에 맞서 강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연설하기도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평소 성실한 근무를 하고 휴가를 쓸 때도 항상 년월차 휴가를 사용하고 일을 하지 않던 고인이 2, 3일을 방황하고 돌아와 분신당일 오전근무를 하고자 오후 8시 출근하고 9시 30분경 교대자를 집에 바려다 주고 11시경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당시 정비과장(배차담당)과 심한 말싸움과 몸싸움을 하고 분을 참지 못한 고인께서 분신으로 항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착하고 성실하게 이 땅의 작은 나사못이 되고자 했던 한 개인이 이렇듯 착취와 억압에 항거하고 불의에 대항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이 슬픔을 넘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고자 월급제를 쟁취하였음에도 그것을 지켜는 것이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힘든 현실이 천덕명 동지를 분노케 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온 몸으로 항거하게 만든 것이다.
전국의 택시노동자는 고인의 의로운 죽음앞에 그 분노의 뜻을, 애절한 가족의 모습을 한시도 잊지 않고 투쟁할 것임을 다시한번 맹세한다.
동지의 염원을 받아 안아 월급제 사수와 노동탄압 분쇄의 깃발을 높이들며 거대한 파도가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모든 불법과 부당함을 쓸어버리고 이 땅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 것을 약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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